독립운동가 김상옥_위인전_아동도서
페이지 정보
등록일 : 24-03-25 조회 : 956본문
▬ 책 소개
“진정한 용기와 사랑을 가진 사람”
김상옥 의사는 어린 나이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해야 했지만, 끊임없이 공부하고자 했고, 열심히 힘든 일을 했어요. 그런 가운데 누군가는 꼭 해야 하나 아무도 할 사람이 없는 일을 나서 했어요. 우리는 그런 분들을 위인이라 불러요.
김상옥 의사는 위인이었어요.
해야 할 일을 보고 선뜻 나서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 일이 어렵거나 위험할 때, 특히 자기 이익과 관련 없는 일일 때 더욱 그러하지요. 그럴 때 나서서 하는 사람이 지도자이지요. 진정한 용기와 사랑을 가진 사람 말이에요. 김상옥 의사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김상옥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사업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보여 주었어요.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어요. 혁신공보를 만들어 민족의식 높이고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10일간 1대1000으로 일본군경과 서울시가전을 벌이고 최후에는 자결합니다. 3·1운동 이후 실망감에 빠져 있던 한국 사람들은 독립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어요.
김상옥 의사는 ‘동대문 홍길동’, ‘경성피스톨’ 이라 불리며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독립 영웅’이예요.
▭ 요 약
독립운동가 김상옥은 어린 시절 대장간에서 일하며 야간학교를 다니며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한다. 야간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야학을 만들고 일하는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며 자신도 공부를 하였다.
유학의 꿈을 갖고 영어 공부를 하고, 기독교 서점 운영과 전국을 다니며 권서 일 을 하여 모은 돈으로 동대문에 형제들과 동대문에 ‘영덕철물점’을 열고, 50명의 직원을 두는 큰 제조업 회사로 성장하며 사업가로 성공한다.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비밀 독립단체‘혁신단’ 조직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사상 계몽에 전념하다 일경(日警)에 잡혀 종로경찰서에서 40여 일간 고초를 당한다.
‘혁신단’을 중심으로 ‘암살단’을 조직하고, 미국 의원단 내한에 맞추어 대대적인 일제 고관 처단, 기관 파괴 거사를 추진하다 당일 오전 예비검속으로 탄로나 실패하고 2달 간 경성에서 은신하다 10월 말 만주로 망명 한다.
상해에서 임정요인 들과 독립운동에 대한 많은 논의를 하며, 국내로 들어와 모은 독립 자금을 임시정부로 가져갔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모여들었던 독립 운동 지도자들이 거의 떠나고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김상옥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임시정부를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하였다.
1922년 임정 요인들과 총독주살 및 ‘총독부 폭파’거사 협의 후 12월 초 서울에 잠입.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독립운동 탄압 본거지인 종로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와 경찰을 놀라게 한다. 서울 시내에 비상경계망을 펼쳤으나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의회에 참석차 동경(東京)에 가는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처단코자 은신 중 1월17일 은신처에 일본 형사대 21명이 기습, 총격전에서 4명 처단, 일본 군경 1,000여 명이 포위한 대설 쌓인 남산을 종단 탈출, 왕십리 안정사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 시내 잠입한다.
1월22일 효제동 생가(72번지) 옆 이혜수 동지댁(73번지)에 은신, 동상 치료 중 적(敵) 군경 1,000여명이 삼엄한 경계 속 4중 포위하자 2정의 권총을 양손에 쥐고, 생가 주변 다섯 집(효제동 72, 73, 74, 75, 76-2번지)을 넘나들며 3시간 여 혈전 끝에 적 16 여명 이상 처단, 마지막 남은 1탄으로 자결 순국 (34세)한다.
▬ 목 차
1. 동대문 근처에서 있었던 일
2. 소년 노동자
3. 밤에 공부하는 학교
4. 미국 유학의 꿈과 영어 공부
5. 기독교 서점 운영과 권서 일
6. 영덕철물점 창업
7. 3.1운동의 함성
8. 비밀 독립 단체 혁신단과 혁신공보
9. 암살단 우두머리
10. 미국 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맞춘 비밀계획
11. 탈출
12. 상하이
13. 장례 치를 관 대신 권총을
14. 종로경찰서 폭파 - 10일간의 시가전 시작
15. 삼판통의 포위망 탈출
16. 효제동 1 : 1000의 대결과 최후
▭ 본문내용
▚ 9쪽
해야 할 일을 보고 선뜻 나서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 일이 어렵거나 위험할 때, 특히 자기 이익과 관련 없는 일일 때 더욱 그러하지요. 그럴 때 나서서 하는 사람이 지도자이지요. 진정한 용기와 사랑을 가진 사람 말이에요. 김상옥 의사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 19쪽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 에는 다른 일하는 청소년들과 함께 신군야학에서 공부했어요. 1년 뒤 신군야학이 교회 사정으로 문을 닫아야 했어요.
‘방법이 있을 거야.’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야 해.’
상옥은 근처의 동흥학교에다 동흥야학을 만들었어요. 상옥은 일하는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면서 자신도 함께 공부했어요.
▚ 39쪽
일본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자 일본 상인들, 제조업자들이 물밀듯이 돈 벌 기회를 찾아 들어왔어요.
“갈수록 우리 경제는 일본인 손에 다 넘어가고 있어.”
사람들은 걱정했어요.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고, 할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거지.”
“좋다! 양말, 장갑 짜는 기계를 들여오자. 우리가 양말, 장갑을 만들어 팔자.”
영덕철물점은 양말과 장갑을 짜서 우리 국민들이 우리 상품을 사서 쓰게 했어요.
사업이 번창하고 하는 일이 늘어나서 일하는 사람이 50여 명이나 되었어요. 김상옥은 큰 사업가가 되었어요.
▚ 48쪽
나라를 잃은 지 10년 만에 3.1운동이라는 큰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당장에 독립이 되거나 독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독립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했어요. 그런데 누가 해요?
‘우리가 해야 해. 내가 해야 해.’
김상옥 의사는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었으나, 필요한 일, 중요한 일인데 할 사람이 없다면 그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77쪽
서울의 한복판 종로경찰서에서 큰 폭발음이 났어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니!”
조선총독부와 경찰은 깜짝 놀랐어요. 종로경찰서는 독립 운동가를 붙잡아 고문하는 본부와 같은 곳이었어요.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보통 대담한 행동이 아니거든요. 범인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요. 경찰이 허둥대며 온 서울 시내에 비상경계망을 펼쳤어요. 그러나 범인을 찾을 수 없었어요.
“우리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구나!”
3.1운동 이후 실망감에 빠져 있던 한국 사람들은 독립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어요.
▚ 90쪽~91쪽
바로 그런 시기에 김상옥 의사가 서울의 한복판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열흘 동안이나 일본 경찰의 비상경계망을 뒤흔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천 명의 포위 속에서 혼자 쌍권총으로 대결한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어요. 35년 동안 일본이 지배하던 서울 한복판에서 이처럼 통쾌한 활약이 없었어요. 일본은 한국인들이 이 사건으로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날까봐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신문보도를 못하게 막았어요.
▬ 서 평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기에 김상옥 의사가 펼친 독립운동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며 우리 민족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고취 시키는데 앞장선 위인이다. 김상옥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용맹은 온 국민들과 어린이들에게 큰 교훈 줍니다